
At Newport (Live)
Count Basie / 1957.09.07 발매
Count Basie - [At Newport (Live)]
"스윙 재즈에 있어 가장 위대한 재즈 뮤지션으로 명성을 날렸던 카운트 베이시는 거의 평생을 자신의 악단을 리드하며 경쾌하고 유쾌한 피아노 솜씨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아티스트이다. 1904년 미국 뉴저지 주에서 태어난 카운트 베이시는 음악가 출신인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음악 교육을 받았다. 패츠 왈러(Fats Waller)에게 피아노를 배우며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그는 20세가 되던 해부터 투어 공연을 시작하였고 한동안 블루스 가수들의 음악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27년 캔사스에 머무르며 주로 클럽 중심의 공연을 펼쳤던 그는 28년 월터 페이지스 블루 데블스(Walter Pages Blue Devils)라는 밴드에 가담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베니 모튼(Bennie Moten)의 밴드에서 35년까지 머무르며 많은 활약을 펼쳤던 카운트 베이시는 자신의 밴드를 결성할 것을 다짐하고 밴드를 탈퇴했다. 베이시스트 월터 페이지(Walter Page), 기타리스트 프레디 그린(Freddie Green), 드러머 조 존스(Jo Jones), 색소포니스트 레스터 영(Lester Young), 보컬리스트 지미 러슁(Jimmy Rushing) 등의 실력 있는 멤버들을 소집하여 자신의 밴드를 결성한 카운트 베이시는 클럽에서의 정기적인 공연과 라디오 프로그램의 고정 출연으로 많은 재즈 팬들에게 이름을 알리며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40년대 접어들어 부드럽고 흥겨운 스윙 재즈를 선보이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카운트 베이시 악단은 46년 [Count Basie: The Orchestra and the Octet]을 발표하며 그 여세를 몰아갔고 47년에도 [Count Basie, Vols. 13]을 발표하여 많은 재즈 팬들을 열광시켰다. 40년대 말 빅 밴드의 인기가 점차 시들해지자 할 수 없이 밴드를 해산시켜야 했던 카운트 베이시는 한 동안 규모가 작은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했지만 52년 다시 빅 밴드를 결성하여 투어에 나섰다. 54년 빅 밴드를 이끌고 스칸디나비아로 건너가 활동을 펼쳤던 그의 악단은 이후 보컬리스트 조 윌리암스(Joe Williams)를 영입하여 [Count Basie Swings, Joe Williams Sings]를 발표하여 새로운 활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55년에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April in Paris]를 발표하여 재즈 팬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얻었으며 이후에도 [The Swinging Count] [Basie Rides Again!] [Count Basie at Newport] [Atomic Mr. Basie]와 같은 훌륭한 앨범들을 연달아 발표하며 최고 전성기를 이어갔다. 58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재즈 그룹으로 선정되는 쾌거를 누리며 팬들의 주목을 받았던 그의 악단은 60년대 접어들어 여성 재즈 보컬리스트 사라 본(Sarah Vaughan)과 함께 앨범을 발표하여 큰 히트를 기록했다. 이후 60년대 중반에는 엘라 피츠제랄드(Ella Fitzgerald), 프랑크 시나트라(Frank Sinatra) 등의 재즈 보컬리스트들과 활동하며 앨범을 발표하여 상업적으로도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으나 60년대 말부터는 다시 스윙 재즈에만 열중하며 밴드 중심의 활동을 펼쳤다. 그는 70년대에도 많은 앨범을 발표하여 여러 차례 그래미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며 75년에는 주트 심스(Zoot Sims)와 함께 [Basie and Zoot]를 발표하여 솔로아티스트로서의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후 주로 파블로(Pablo)와 오리지날 재즈(Original Jazz)를 통하여 꾸준히 앨범을 발표하며 노익장을 과시하였지만 70년대 후반부터 나빠지기 시작한 건강 악화로 84년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 평생을 빅 밴드의 리더로써 변함없는 활동을 보였던 카운트 베이시는 진정한 스윙의 거장으로서 재즈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겼으며 많은 연주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위대한 뮤지션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