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mortal Conductor - Eugene Ormandy
Eugene Ormandy / 2010.05.18 발매
불멸의 지휘자- 유진 오먼디
* 대지휘자들의 드라마틱한 삶과 예술혼, 거장들의 창조성과 리더쉽을 조명한 안동림의 역작 <불멸의 지휘자>를
음반으로 기획 제작한 시리즈 제2탄! ? 유진 오먼디와 레너드 번스타인의 베스트 모음집 (3CD)
무개성의 개성 - 유진 오먼디
후바이에게 사사했던 바이올리니스트
오먼디는 20세기가 시작되기 불과 한 달 반 전인 1899년 11월 18일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한 치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철들 무렵이 되면서 바이올린에 반해 4살 때 소형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듬해에 부다페스트 왕립 음악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9세 때 거장 예네 후바이Jeno Hubay, 1858~1937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20세기의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로 칭송되는 시게티Joseph Szigeti, 1892~1973가 후바이의 제자였다. 오먼디의 본명은 ‘블라우Blau’였으나 스승 후바이의 이름을 본떠 예네를 영어식으로 옮겨 ‘유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스승을 존경했던 모양이다. 18세에 졸업장을 받음과 동시에 교수 칭호까지 얻었다. 곧 베를린의 블뤼트너 관현악단Buhner Orchestra의 콘서트 매스터로 취임했고 아울러 독주자로도 활약하여 앞날이 기대되는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라는 평가를 받았다.
1921년 오먼디는 미국에 연주여행을 갔지만 악덕 매니저에게 속아 낯선 이국 땅에서 그만 오갈 데 없는 한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취직한 곳이 뉴욕의 영화관인 캐피톨 극장의 바이올린 주자 자리였다. 나중에 콘서트 매스터로 승격했다. 아직 영화는 무성 시대여서 극장마다 반주를 위한 오케스트라가 있었다. 1924년 9월, 병으로 쓰러진 같은 헝가리계의 지휘자 라페Erno Lappe, 1891~1945의 대역으로 처음 지휘대에 섰다. 그러나 그저 영화관의 피트 오케스트라 지휘자였으며 연주곡목은 가벼운 포퓰러 명곡이었다. 1925년에는 그 극장의 준음악감독에 취임, 이어 1929년에 뉴욕 휠하모니의 루위존 스태디엄the Lewisohn Stadium 연주회에서 지휘자로 데뷔했다. 또 1930년에는 로빈 후드 델 연주회에 객연 지휘를 하여 대성공을 거두어 새 시대의 팝스 지휘자로 크게 주목받았다.
그리고 1931년에는 휠라델휘아 관현악단에 토스카니니의 대역으로 등장하였다. 본격적인 심포니의 지휘자로 절찬을 받으며 나타난 것이다. 이 연주회에는 미네아폴리스 악단의 이사가 남몰래 청중석에 앉아 있었다. 악단의 지휘자 자리가 공석이 되어 다음 인물을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오먼디는 곧 미네아폴리스 교향악단의 객연 지휘자로 초대되었고 그해 안에 음악감독 계약에 서명했다. 전화위복으로, 매니저에게 사기당한 후 10년 만에 행운을 맞이한 것이다. 미네아폴리스 교향악단 재임 기간 5년 동안에 그는 철저하게 오케스트라를 훈련하여 전 미국 최고의 앙상블로 키워놓았다. 빅터 레코드RCA가 즉각 주목하여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 카펜터John Alden Carpenter, 1876~1951의 〈유모차 안에서의 모험Adventures in a Perambulator〉, 코다이의 조곡 〈하리 야노슈〉, 해리스Roy Harris, 1898~1979의 〈죠니가 개선할 때When Johnny Comes Marching Home〉 등 현대음악을 중심으로 녹음했다. 그중에서도 말러의 교향곡 제2번 〈부활〉은 그들 최초의 대곡으로 주목을 받았다. 당시 말러 교향곡은 지금과 달리 대중적인 인기가 없어서 교향곡 전곡 연주란 아주 드문 일이었다. 또 그 무렵의 RCA에는 토스카니니를 비롯하여 스토코프스키, 쿠세비츠키, 스토크Frederick Stock, 1872~1942 등 쟁쟁한 명지휘자가 버티고 있어 오먼디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그러나 야심적이고 패기 넘치는 곡목이라 할 만했다.
5년 동안 그는 미국에서 완전히 청중을 사로잡았고 1936년에는 스토코프스키가 음악감독을 맡아 인기의 절정에 있던 휠라델휘아 관현악단의 준지휘자로 취임했다. 2년 뒤인 1938년, 그는 스토코프스키의 뒤를 이어 정지휘자가 되었다. 그때 오먼디의 나이는 불과 39세라는 한창 나이였다. 그 무렵 30대의 지휘자가 미국 초일류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된다는 사실부터가 이변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 3대 오케스트라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 휠라델휘아 관현악단을 혼자서 근 40년여나 이끌어왔다는 사실은 그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났던가를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