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ri Te Kanawa
여성/솔로
키리 테 카나와 Kiri Te Kanawa, (1944.3.6~) 뉴질랜드, 소프라노 성악가
뉴질랜드의 기스본에서 원주민 마오리족을 아버지로 유럽계의 여인을 어머니로 하여 1944년에 태어난 키리 테 카나와는 집안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생후 5주만에 마리오족과 아일랜드인 부부인 테 카나와家의 양녀로 입적했고, 양어머니인 넬 여사는 열심으로 키리를 키웠다.
그녀가 5살 때 노래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양어머니는 뉴질랜드 최고의 선생에게 딸을 맡기기 위해 남편의 직업을 바꿔가면서까지 오클랜드로 이사하여 본격적인 성악 공부를 시켰다. 그 결과 뉴질랜드와 오스트리아의 경연대회에서 많은 상을 받았고 22세 때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런던의 오페라 센터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1969년에 조국으로 돌아가 뉴질랜드 오페라 컴퍼니에 들어갔고 '카르멘'으로 데뷔하였다. 이듬해 런던으로 온 그녀는 코벤트 가든 왕립 가극장과 계약을 맺고 1971년, [파르지팔]의 '꽃의 소녀'역으로 데뷔하였다.
이어서 [보리스 고두노프]에서 '크세냐'역을 맡았고,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에서 '백작부인'역을 맡아 열연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때부터 그녀의 무대는 전세계로 확대되어 싼타페 가극장, 파리 오페라 극장, 그라인드본 음악제 등에 초청되었고, 가는 곳마다 백작부인 역으로 큰 갈채를 받았다.
키리 테 카나와의 레퍼토리는 그 폭이 아주 넓다. 바흐, 헨델, 모차르트, 베토벤 등 고전들, 베르디, 푸치니 등 이탈리아 오페라, 구노, 포레 등 프랑스 곡목들과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와 말러의 가곡 등 대단히 폭넓고 다채로운 연주 곡목들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마이 훼어 레디]등의 뮤지컬에서도 키리는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레퍼토리를 통해서 키리가 얼마나 폭넓고 유연한 감성의 소유자인지를 알게 한다.
그런 중에서도 모차르트는 그녀의 특별한 부분인 듯 싶다. 지금까지 발표된 그녀의 음반 중 옴니버스 스타일로 편집된 것을 제외하고서도 모차르트의 음반이 9개나 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키리의 음반이 총 35종이라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전체의 약 1/4이 모차르트의 것이다. 키리가 아직은 무명의 오페라 가수였던 1971년 12월 1일, 그녀는 코벤트 가든 왕립 가극장 무대에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의 '백작부인'역으로 섰다. 제2막의 아리아 '사랑의 신이여 사랑을 내리소서'를 부르고나자 청중의 시선은 그때부터 그녀 한 몸에 쏟아지기 시작했고, 제3막의 '그리운 그 시절은 가고'를 끝내자 객석에선 열광과 환희의 박수, 고함이 터져 나왔다. 다음 날 신문엔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다'는 큼직한 활자가 찍혀 있었다.
Dame Kiri Te Kanawa의 신화는 이렇게 시작되어 오늘에 있어서 그녀의 음악적 위상은 그야말로 우상적인 것이라 하겠다. 1976년, 명 연출가 보넬이 칼 뵘을 지휘자로 선정하고, 디스카우, 헤르만 프라이, 미렐라 프레니 등을 기용하여 텔리비젼 용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촬영할 때 키리 테 카나와를 백작부인으로 기용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닌 것이다. 적어도 백작부인 역에 관한 한 키리의 노래와 연기는 최상급의 것이었던 것이다.
키리가 지구촌의 음악 애호가들에게 결정적으로 돋보이는 가수가 되었던 이벤트의 하나로 1981년에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거행된 [세기의 결혼]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비(妃)의 로열 웨딩(Royal Wedding)에서 영예의 독창자로 선정되어 노래했던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듬해 그녀는 기사에 해당하는 데임(Dame)작위를 받는 영광을 차지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