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n Carter
남성/솔로
론 카터는 1937년 미시간 주 페르난델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큰 관심을 가진 그는 10살 때 첼로 연주를 시작했다. 그러나 가족이 디트로이트로 이주하면서 그는 인종에 대한 사회의 고정관념으로 인해 첼로에서 베이스로 자신의 악기를 바꾸게 된다. 자신의 악기를 바꾼 그는 1959년 학위를 취득할 때까지 이스트만 스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베이스를 연주하게 된다. 이후 뉴욕으로 이주한 론 카터는 당시 알토 연주자 에릭 돌피(Eric Dolphy)가 활동하고 있던 치코 해밀턴 퀸텟(Chico Hamilton Quintet)에 세션으로 참여하는 한편 맨해튼 뮤직 스쿨에 입학해 1961년 졸업한다. 치코 해밀턴이 서부로 돌아간 이후 론 카터는 에릭 돌피, 트럼펫 연주자 돈 엘리스(Don Ellis) 등과 연주하며 자신의 이름을 점차로 알려갔고 1961년 에릭 돌피, 말 왈드론(Mal Waldron) 등이 게스트로 참여한 자신의 첫 번째 리더작 를 발표하게 된다.
60년대 초반 론 카터는 랜디 웨스턴(Randy Weston), 델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 잭키 바이어드(Jaki Byard) 등과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쳤고 아트 블레키의 재즈 메신저스의 피아니스트로 잘 알려진 바비 티몬즈(Bobby Timmons)의 앨범은 물론 연주 여행에도 동행, 당시 활동하던 베이스 연주자들 가운데 주도적인 위치에 자리하게 된다. 1963년 트럼펫 연주자 아트 파머(Art Farmer)의 그룹에 잠시 참여한 그는 재즈 베이스 역사에 있어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하게 만들어 준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의 두 번째 황금 퀸텟에 참여, 1968년까지 함께 하며 마일즈 데이비스의 진보적 하드 밥의 완성에 동참하게 된다. 허비 핸콕(Herbie Hancock), 토니 윌리암스(Tony Williams)와 더불어 마일즈 데이비스 퀸텟의 리듬섹션의 중요한 축으로 활동한 그는 과거 마일즈 데이비스의 첫 번째 황금 퀸텟의 레드 갈란드(Red Garland), 폴 챔버스(Paul Chambers), 필리 조 존스(Philly Joe Jones)로 이어지는 리듬 섹션과 더불어 재즈 역사상 최고의 리듬 섹션으로 인정받으며 재즈 베이스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60년대 후반 재즈 록을 본격적으로 추구한 마일즈 데이비스의 곁을 떠난 그는 세션 활동과 더불어 자신의 솔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론 카터의 둥그런 톤으로 펼치는 정확하고도 생동감 넘치는 워킹 베이스는 어떤 뮤지션과 연주하더라도 완벽한 타임 키핑의 역할을 완수했고 여기에 전체적인 사운드를 지탱해 가는 그의 음악적 아이디어와 연주가 첨가되어 수많은 명연을 만들어 냈고 이는 그로 하여금 1970년대 중반 400장이 넘은 앨범에 세션으로 자신의 이름을 남기며 거장의 대열에 들어서게 만들었다. 이후 론 카터는 다양한 뮤지션들을 참여시킨 자신의 그룹을 이끌었는데 특히 본인 이외에 또 한 명의 베이스 연주자를 참여시켜 타임키핑을 감당하게 하고 론 카터 자신은 그 위에 자유로운 즉흥연주를 통한 새로운 하모니를 만들어 가는 모습을 선보이게 된다. 또한 베이스라는 악기의 음악적 표현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베이스와 첼로의 장점만을 조화시킨 피콜로 베이스(Piccolo bass)라는 악기를 발명, 자신의 음악적 표현을 극대화 시키는데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활발한 연주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