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xter Gordon
남성/솔로
덱스터 키스 고든은 1923년 2월 27일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리스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클라리넷을 배우다 알토 색소폰으로 바꾸어 색소폰의 감각을 익힌 후에 테너 색소폰으로 완전히 정착한다. 1940-43년에 걸쳐서 당시 인기 절정에 있던 바이프라포니스트 라이오넬 햄프턴악단에서 활약하다가 1943년 레스터 영의 섹스텟을 거쳐, 1944년에는 루이 암스트롱 악단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뉴욕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1947년에는 역시 테너 색소폰의 거장 와델 그레이와의 투 테너 세션을 LA에서 레코딩하여 다이얼 레코드사를 통해 발매하였는데, 후에 저작권이 스포트라이트로 넘어갔다. 이를 계기로 1952년까지 비정규 멤버를 구성하여 투 테너를 이용한 배틀을 실시하여 인기를 절정에 올려놓았다.
한편, 데카사를 통하여[Chase]라는 음반을 내놓았는데, 이들 테너 배틀의 라이브 녹음이 라는 면에서 상당한 가치를 인정받은 앨범이다. 이 중간에도 찰리 파커나 버드 파월 등과의 교분과 공연을 포함하여 초기의 리더 세션은 사보이 레이블을 통하여 발표되었는데, 이 앨범이[Dexter Rides Again]이라는 명반으로, 그를 알기 위해서는 필청의 음반으로 일종의 통과 의례격인 셈이다. 1952-60년까지는 마약 중독으로 인해 거의 활동을 못한 안타깝고 암울한 시기였지만, 1955년 일시 복귀하여 베들레헴 레이블에[Daddy Plays the Horn]을 포함한 몇몇 작품을 남긴다. 물론 LA에서 레코딩한 앨범들인데 국내에서는 찾기가 힘들고 절판이 되어 복각이 어려운 상태다.
1960년 LA에서 완전히 복귀하는 역사적인 세션을 하면서 옛 영화를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완전한 덱스터의 인간 승리라고 찬사하고 싶은 시기다. 이를 계기로 명문 레이블 블루 노트와 1961년 전속 계약을 체결하면서 다시 뉴욕으로 거주를 옮기게 된다. 이 시기에 레코딩한 가작들로[Doin' All Right]와[Go]등의 작품이 이어진다. 이로써 덱스터의 존재를 다시금 알리는 호기를 맞으면서 그의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1962년 말에 처음으로 유럽 투어링 콘서트를 실시하면서 팬들을 확보하게 되었고, 1963년 봄에 그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전혀 무리 없는 앨범[Our Man in Paris]를 블루 노트에서 발매하여 공전의 히트를 치는 쾌거를 이룬다. 물론 파리에서 활동중이던 피아니스트이자 옛 친구 파월과 비밥 드럼의 완성자 케니 클락과 프랑스가 자랑하던 베이시스트 피에르 미셸로가 함께 이룩한 수작이다.
이를 기화로 덱스터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덴마크 코펜하겐의 유명한 재즈 클럽 '카페 몽마르트르'에서 스페인 출신의 장님 피아니스트 테테 몽트루와 베이스에 닐스 헤닝 외스테드 페델센, 서정적인 피아니스트 케니 드류 등을 영입하여 하우스 밴드를 결성하여 맹활약하였다. 이 시기에 덴마크의 전문 재즈 레이블 '스티플 체이스'가 상당한 수의 레코딩을 남겨 발매하였는데, 그중에서[Montmartre Collection vol. 1-3]이 있고, 세션맨을 교체하여 레코딩한 앨범이 여러 장 있다. 물론 덴마크의 뮤지션도 포함되어 있다.
체류하는 동안에도 일시적으로 귀국하여 계약대로 레코딩을 남기고 있는데, 1965년, 69년, 70년에 블루 노트에서 [Gettin' Around]를, 프레스티지 레이블로 [The Panther]를 뉴욕에서 녹음하였다. 1976년 말, 14년 만에 완전히 귀국한 그는 컬럼비아사를 통하여 Home Coming]을 빌리지 뱅가드 클럽에서 실황 녹음하여 출반하였다. 1977년부터는 피아니스트 조지 케이블스 등을 포함한 자신의 밴드를 결성하여 본국에서의 활동을 전방위적으로 실시하며 적극적인 연주 생활에 몰입하는 분주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1983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연주를 잠시 멈추었으나. 집념과 자기 관리를 열심히 하여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였는데, 이때를 그는 다시 재즈사에 큰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으로 기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