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rlie Christian
남성/솔로
“재즈에 기타솔로의 비중을 늘리는 시도는 일종의 음 확장감을 위해서이다. 여타 관악기뿐만 아니라 기타도 그 자체가 재즈라는 것을 훌륭하게 확장시켜 준다.”
일렉트릭 기타의 효시로 알려진 샬리 크리스티앙은 1919년 미국 달라스에서 태어나 아주 어릴때 오클라호마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트럼펫 주자였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던 관계로 샬리는 음악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샬리가 처음으로 연주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의 아버지가 이끄는 가족단위의 밴드에서의 라이브이다. 한편 그는 이러한 연주경험 뿐만 아니라 유명 스윙 연주자들의 음악을 접하며 음악적 감각을 키워 나갔다.
15세 때 샬리는 본격 직업 뮤지션으로서의 공연을 감행했는데, ‘Alphonse Trent’s Sextet’에서의 연주생활이 그것이다. 39년에 샬리는 베니 굿맨과 레코딩을 시작했고, 이외에도 수많은 재즈맨들과 협연을 개시했다.
그는 앰프기타를 시도하고 그것을 대중화한 기타리스트로 잘 알려져 있다. 사실 비슷한 시기에 장고 라인하르트가 자신의 ‘Maccaferri’어쿠스틱 기타에 픽업을 설치해 앰프기타용으로 사용했지만, 진정한 기원을 따져 올라간다면 샬리 크리스티앙부터라는 것이 정설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재즈에 애드립 지향의 연주를 시도한 최초의 기타리스트이며, 비밥기타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샬리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에 의한 다운스트로크 위주의 피킹을 펼쳤는데 이러한 ‘thumb Picking’주법은 이후 그의 열렬한 팬이었던 웨스 몽고메리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믹솔리디안 모드와 크로매틱 스케일적인 진행을 즐겼던 샬리 크리스티앙은, 스트레치 방식을 재즈기타에 도입해 재즈기타 라인을 확대시키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안에 싱코페이션을 사용치 않는 솔로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는 베니 굿멘의 6인조 악단과 연주한 'Breakfast Feud'에서 이와 같은 싱코페이션 없는 블루스 코러스들을 연주하고 있는 걸 들을 수 있다.
몇 가지 앞서가는 연주를 보여준 이 재즈기타의 선구자는 재능을 채 꽃피우기도 전인 42년 3월 23일 결핵으로 죽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23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