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치히의 음악원에서 배운 다음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E.달베르에게 사사하였다. 1900년 데뷔하고, 그 후 교직활동과 함께 주로 연주활동을 계속하였다. 1905년 파리에서 개최된 루빈슈타인콩쿠르에서는 후에 대작곡가가 된 B.버르토크와 경연, 그를 물리치고 입상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은 물론, 스위스에 귀화한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각지에서 적극적인 연주활동을 계속하여 ‘건반의 사자왕’이라 불렸으며, 베토벤과 브람스의 해석에 정평이 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