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ames Levine
남성/솔로
제임스 레바인 James Levine, (1943.6.23~) 미국, 지휘자 & 피아니스트
제임스 레바인은 1943년 6월 23일, 미국 오하이오州 신시네티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랠리 리'라는 애칭으로 불려진 댄스밴드의 리더이자 바이얼리니스트 였고 어머니는 배우였다. 후일, 레바인이 오페라 지휘자로 대성을 거둔 데 는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극장에 대한 태생적인 감각이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4살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10세 때 신시네티 교향악단과 멘델스존의 협주곡을 협연할 정도로 매우 빠른 진보를 보여주었다. 1956년, 루돌프 제르킨이 주최한 '말보로 음악제' 세미나에 참가하여 피아노와 실내악, 오페라 합창 지휘 등을 배우는 기회를 가졌고, 1957년부터 1966년까지 해마다 '아스펜 음악제(콜로라도에서 열림)'에 참가해서 로지나 레빈(피아노), 월터 트렘플러(바이올린)에게 사사하는 한편 비제의 오페라 '진주조개잡이'를 지휘하는 기회도 가졌다.
1961년, 줄리어드 음악원에 입학해서 쟝 모렐에게 지휘법을 사사하고, 아르바이트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연습 반주자로 일하면서 오페라에 대해 전문적인 안목을 갖기 시작하였다. 1964년, 음악원을 졸업하자마자 조지 셀(George Szell)의 부름을 받고 클리브랜드 관현악단의 부지휘자가 됐는데, 이는 이 악단 역사상 최연소 부지휘자이기도하여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이 자리에서 6년간 일하면서 조지 셀의 지도를 받았다. 조지 셀은 매우 엄격하게 레바인을 지도했고 이 과정을 통해서 그에게 내재된 지휘자로서의 천재적 자질이 개발될 수 있었다.
6년 뒤, 부지휘자를 그만둔 레바인은 어느 악단과도 전속계약하지 않은 채 시카고, LA, 필라델피아, 애틀랜타, 피츠버그, 덴버, 뉴욕, 런던에서 객원으로 지휘했다. 1971년 6월 5일, 레바인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가극장 지휘대에 섰다. 그가 지휘한 작품은 푸치니의 '토스카'였다. 1972년엔 병을 얻은 이스트반 케르텟츠 대신으로 시카고 교향악단을 이끌고 '라비니아 음악제'에 참가하여 말러의 교향곡 제 2번 '부활'을 지휘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2개의 주요한 지휘를 통해서 제임스 레바인이라는 이름은 일약 주목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1973년, 필하모니아 교향악단을 지휘하면서 영국에 데뷔하였고, 이듬해엔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의 초빙을 받아 '운명의 힘'을 지휘하였다. 1975년엔 런던 교향악단을 이끌고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참가했고, 다음 해에 이 음악제에서 모차르트의 '티토왕의 자비'를 지휘하였다. 지휘자로서 레바인의 입지는 이제 너무도 튼튼하게 구축되고 있었던 것이다. 레바인은 1973?1974년 시즌의 메트로폴리탄 가극장 수석 지휘자로 취임하고(이전에는 매트에 수석 지휘자를 두지 않았다), 라비니아 음악제와 '신시네티 5월 음악제'의 음악감독을 맡는 등 그의 지휘활동이 매우 분망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1976년엔 메트로폴리턴 가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자리가 올랐고 이 때부터 오페라 전문 지휘자로서의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정력적인 활동이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1976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말러 음악제에 초빙되었고, 이 무렵에 필라델피아 관현악단과 말러의 교향곡 전곡 녹음이라는 야심에 찬 작업이 개시되었다. 33살 때의 상황이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빈 필하모니와 모차르트의 교향곡을 시리즈로 녹음하면서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1991년부터는 콘서트 분야에도 힘을 쏟기 시작하는데, 메트 오케스트라와 기획한 독자적인 콘서트 투어로 카네기 홀을 비롯한 유명 콘서트 홀에서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열어 대단한 성공을 거두는 한편, 이미 말러의 교향곡 시리즈에서 받은 호의적인 평가의 기세를 몰아 '걸출한 콘서트 마에스트로'라는 위상을 확립시켰다. 이로써 레바인은 음악사상 보기 드문 오페라와 콘서트에서 두루 능한 지휘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