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runo Walter
남성/솔로
브루노 발터는 시적 감수성이 뛰어나고 풍부한 상상력과 표현력을 지닌 내면적인 지휘자였다. 심미적인 음악 표현에 뛰어나 모차르트 속에 잠재한 심미적인 성격마저 끌어냈으며, 말러의 해석에서는 절묘한 감수성을 나타냈다. 모차르트의 우아, 베토벤의 정서, 브람스의 중후, 말러의 도취, 요한 슈트라우스의 감미...발터는 음악에 따뜻한 피를 통하게 한 서정시적인 지휘자였던 것이다.
세계적인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브루노 발터는 독일 베를린에서 ‘Bruno Walter Schlesinger’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는 베를린의 슈테른 음악원에서 수학하고, 에리히, 부슬러, 라데케 등에게 사사받아 졸업 전부터 지휘자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쾰른, 함부르크, 프레스부르크(현 브라티슬라바), 리가, 베를린 등지에서 지휘 경험을 쌓으며 실력을 연마했다.
그러다가 대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와 만나게 되는 데, 이것은 발터의 음악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전환이었다. 1901년 함부르크에서 말러를 만나 그의 작품과 말러라는 인물의 퍼스널리티에 감동했는데, 말러 역시 발터의 재기를 높이 평가해 발터를 빈 궁정 오페라 극장에 초빙, 부지휘자가 되게 했다. 둘 사이의 이러한 존경과 신임은 1912년까지 계속되었다. 발터는 말러와 교류하는 동안 음악, 예술, 사상, 철학과 그 밖의 많은 것을 배웠다. 1911년에 베를린의 징크아케데미를 지휘하기 시작한 발터는 2년후인 1913년부터 22년까지 모틀의 후계자로서 뮌헨 국립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도 활약하기에 이른다.
그 동안 발터는 오페라 기획에서 상연에 이르기까지의 풍부한 지식이 일반에게 인정을 받아 1909년 3월 런던의 로열 필을 지휘했고, 코벤트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 무대에도 서며 상류층 팬까지 확고하게 끌어 모을 수 있었다. 이후 그는 1925년 베를린 샤를로텐베르크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가 되고, 1930년부터 1933년까지는 저 유명한 세계적 악단인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즈음 독일의 정치적 격변기라 발터는 독일을 떠나 빈으로 가 그곳에서 음악활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36년부터 잘츠부르크의 음악제의 빛나는 전통을 수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함과 동시에 국립 오페라 극장 및 빈 필의 연주에 대해서도 전력투구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1938년 오스트리아도 독일의 지배 하에 들어감에 따라 중앙 유럽에서의 활동을 단념하고, 프랑스 국적을 얻어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에서 지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루체른 페스티벌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유럽 정세가 점점 더 심상치않음을 느낀 발터는 1939년 미국에 이주해 1년후인 1940년부터 NBC 교향악단과 뉴욕 필 등을 차례로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년후에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을 지휘하기에 이른다. 한편 1947년부터 1949년까지는 뉴욕 필의 지휘자와 조언자로서 활약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유럽에서 객원 지휘자로서 에든버러 음악제에 출연하여 많은 명연을 들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발터는 80세가 되던 1956년 은퇴를 발표해 음악팬들을 아쉽게 하기도 했다. 당시 발터는 캘리포니아 비버리힐스에 있는 자택에서 살았는데 CBS 측은 발터를 위해 컬럼비아 교향악단을 특별 조직해 그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발터의 만년 지휘세계의 정점을 보여준 이곳에서의 많은 명연은 다수의 레코딩을 통해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1962년 2월 17일 브루노 발터는 비버리힐스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생애를 마쳤다. 향년 85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