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혼성/오케스트라



비엔나 필하모닉 Vienna Philharmonic, VPO, (1842~) 오스트리아, 오케스트라
 (= in German: Wiener Philharmoniker)


1842년에 창단된 이래 한 세기 반동안 정통적인 빈의 가락을 유지하며 연주를 해오고 있는 빈 필하모닉 관현악단(VPO)이 그것이다. 만약 빈에서 VPO가 사라지고 없다면 오늘날의 빈은 어떤 도시로 남아 있을 것인가. 그것은 해묵고 때묵은 옛 음악사의 발자취가 아로 새겨진 고적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더욱이 음악 연주의 중심도시가 런던으로 옮겨가 버린 지금, VPO 없는 빈이란 생각할 수조차도 없는 일이다.


VPO가 탄생한 것은 낭만주의 음악의 탄생과 거의 때를 같이 한다. 1842SUS이면 바그너가 혈기왕성한 29세 청년일때요. 브람스는 불과 열 한 살의 소년기를 보내고 있을 때다. 그 해에 아메리카 신대륙에서는 뉴욕 필하모닉이 탄생하기도 하여 구미 양대륙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가 동갑내기로 태어난 셈이다.


VPO를 창단시킨 주역은 오토 니콜이다. 당시 빈 궁정 가극장의 악장으로서 일련의 콘서트 시리즈를 지휘하던 그가, 이러한 연주를 담당해 나갈 주체로서의 전문 연주악단을 필요로 한 것이 VPO의 발단이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VPO의 탄생은 처음부터 빈 궁정가극장 관현악단의 한 분과로 생겨났기 때문에 이들의 상호관계는 아직까지도 유지되어 오고 있다. 즉 오늘날 빈 국립가극장이라고 불리는 오페라극장이 옛 빈 궁정가극장이었고, 거기서 연주를 담당하는 관현악단이 VPO의 실체나 다름없는 것이다. 다만 레코드 표기에 따라서는 악단을 구별할 필요가 없어 `빈 국립가극장 관현악단'과 VPO로 나누어지나, 실제로는 같은 악단이라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동독의 드레스덴 국립가극장 관현악단과 드레스덴 국립관현악단의 경우와 같다.


오토 니콜라이 이후 VPO를 지휘한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 잊지 못할 지휘자가 한 사람 있다면 지난 81년 8월 14일 뇌일혈로 쓰러지기까지 평생의 음악적 반려로 VPO를 택했던 거장 칼 뵘일 것이다. 그는 VPO와 함께 20세기 연주사에 길이 남을 명연주의 향연을 펼치면서 고전음악이 갖는 감동의 깊은 곳까지 헤집고 들어가 참으로 우뚝 솟은 거봉을 남기고 갔다. VPO는 창단 당시부터 지금까지 상임제도를 두지 않고 수석지휘자 시스템을 유지해 오고 있다. 따라서 위에 열거한 대표적인 지휘자들 역시 모두가 상임이 아닌 수석의 자격으로 VPO를 이끌어 왔다. 그들과 함께 세계적인 거장들도 수시로 VPO를 찾아와 악단을 살찌게 해주었다. VPO의 연주와 관계를 맺은 모든 지휘자들의 이름 그 자체는 현대 연주사의 총체적인 집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번스타인이 미국을 떠난 뒤에도 주로 VPO와 연주를 하고 있다.


VPO는 여러 가지 부수적인 연주형태를 가지고 있다. 정기 연주회 이외에도 니콜라이 콘서트,루프트벵글러 콘서트가 열리며, 1925년부터 시작된 신년음악회의 연주도 VPO를 특징 짓는 세계적인 명물이다. 1935년에 시작된 오페라 극장 무도회 연주도 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취다. VPO는 베를린 필과 함께 가장 많은 레코드 녹음을 내놓고 있다. 모두가 DG 라벨로 발매되고 있으나, 푸르트벵글러에 의한 몇 장의 EMI 녹음도 특기할 만한 값어치를 지닌다. 가끔씩 영국의 데카 레코드를 위해 녹음도 하지만 그 대종은 모두 DG에 몰려 있다. 뵘과의 베토벤 전집은 VPO가 조형한 고전주의 음악의 전형이다. 더불어 모짜르트 후기 교향곡도 교향악의 진수를 들려 준다. 카라얀이 데카에 녹음한 오페라 전곡 판들도 불멸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아이다>는 그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명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