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ladimir Horowitz
남성/솔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Vladimir Horowitz, (1903.10.1-1989.11.5) 우크라이나(러시아) & 미국, 피아니스트
호로비츠는 1904년 10월 1일 크라이나의 키에프에서 엔지니어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래의 이름은 호로비츠가 아니라 고로비츠(Gorowitz)였으며 1925년 베를린 데뷔시에 이름을 바꾸게 된다. 집안은 안정되고 부유했으며 가족들은 매우 지적인 사람들이어서 집안에 매우 많은 고전 서적들이 갖추어져 있어 어린 시절 호로비츠는 이들 서적을 탐독했다고 한다. 호로비츠가 피아노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것은 1907년 어머니인 세르게이 타로노프스키로부터였다.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기 시작한 것은 6살 때, 안톤 루빈시타인과 차이코프스키에게 음악을 배웠던 대교육자 펠릭스 블루멘펠트에게 배우면서였으니, 가장 정통적인 러시아 음악의 흐름을 이어받을 수 있는 축복받은 조건이었다. 호로비츠의 음악가로서의 장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이었다. 부유하고 문화적이었던 그의 집안은 혁명으로 인해 완전히 몰락하게 되고 호로비츠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급히 피아니스트로 데뷔하게 된다. 1924년에서 25년에 걸쳐 11개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23번의 리사이틀을 여는 등 70여 회의 콘서트를 가지면서 초인적인 기량을 과시한다.
25년으로서 첫 번째 무대는 베를린이었다. 베를린에서 3번의 리사이틀을 성공적으로 마친 호로비츠는 다음 해 함부르크에서 후에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곡이 되는 차이코프스키의 1번 협주곡을 연주하여 청중들을 경악하게 한다. 이후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던 호로비츠는 1927년 당시 최고의 흥행사였던 아더 짓슨에게 발탁되어 미국에 데뷔하게 된다. 다음 해인 1928년 토머스 비첨과 함께 한 뉴욕 데뷔연주는 그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굳히는 계기가 된다. 이 연주회는 동시에 비첨의 뉴욕 데뷔이기도 했으며 프로그램은 차이코프스키의 1번 협주곡이었다. 그 때를 기억하는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후에 '당시의 호로비츠는 폭풍이었다'라고 술회했듯이, 그의 연주는 얼마간 요란스러우면서도 당시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신선함과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호로비츠가 토스카니니와 만난 것은 1932년의 일이다. 이 무렵부터 호로비츠의 은퇴-복귀가 시작되게 된다. 호로비츠의 음악적 기량이 절정에 달했던 것은 40년대에서 50년에 걸친 시간이었으며 그다지 녹음상태가 좋지는 못해도 이 시기의 음반들은 결코 내외적으로 훌륭한 균형을 이룬 그의 음악성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40년대 초반에 녹음된 '전람회의 그림' (RCA)에서 그는 독자적인 피아니즘의 한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은둔생활을 계속하던 중에 녹음된 슈만의 '어린이 정경' (CBS)에 이르면 여전히 주관적인 성격이 강한 연주라도, 4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이있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1965년 4월, 12년간의 공백 끝에 카네기홀에서 가진 복귀연주는 극히 '미국적인'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유럽에서였다면 아마도 그 정도의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날의 실황은 레코드로 제작되어 ('The Historical come back' CBS)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했고,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전설'이 되었다. 이후 호로비츠는 두 번의 잠적을 더 가지게 되지만 그 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으며 70년대에도 리스트와 라흐마니노프를 레퍼토리로 하여 경이적인 연주를 계속하여 들려주게 된다. 이 무렵의 기록인 '메피스토 왈츠' (RCA)라든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 (RCA, 유진 오먼디/뉴욕 필)을 통하여 들을 수 있는 호로비츠의 면모에서, 이미 그를 평생동안 따라다닌 상업성 등의 꺼림칙한 이미지는 완전히 초월해 있음을 알 수 있다. 혹은 그러한 대중성마저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동화시켰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986년 이미 80을 훌쩍 넘긴 호로비츠는 갑작스럽게 DG와 전속계약을 맺는다. 1986년 호로비츠는 꿈에도 그리던 모스크바 연주를 가지게 된다. 'Horowitz in Moscow'라는 제목으로 DG에서 음반과 영상물로 출판되어 있는데, 단순히 뛰어난 연주라는 것 이상의 감동을 전해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1989년 11월 5일 호로비츠는 병석에서가 아니라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녹음을 편집하던 중 갑작스런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건강상태는 나이에 비해 극히 양호한 편이었다고 한다. 평소 부인인 완다에게 남긴 유언에 따라 호로비츠는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있는 토스카니니의 가족 묘에 묻히게 되었다.